스타트업의 직함 놀이에 대하여
스타트업씬은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그래서 많은 자리에 어떻게든 얼굴을 비추고 서비스를 소개하고, 명함을 주고 받으려 애쓴다. 어떻게든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애쓰는데, 이런 강한 목적성의 관계 맺기는 편치않고 껄끄럽다.
회사를 다녔던 시절에도 목적성 강한 관계 맺기는 빈번했다. 프로모션 대행사 기획, 게임회사 마케팅이라는 업무 특성상 협력할 외부 관계사가 많고 늘 새로운 관계 맺기에 열려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의 성향도 여기에 잘 맞았다. 이런 여건에 있었지만, 내가 만든 회사의 대표로서 목적성이 강한 관계를 맺는 일은 그 성격부터 달라 새롭게 적응해야했고 한마디로 더 퍽퍽했다.
그때 그사람들, 지금 어디에 있을까
새로운 관계 맺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것은 아니다. 네트워킹 과정에서 주고받는 명함들은 대부분 C자로 시작하거나, 창의적인 직함들이 새겨져있었다. 대부분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가 건네는 명함에서 그런 명칭들을 그 사람의 이름보다 먼저 보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반짝이며 쳐다봤다.
다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의 명함을 쭉 살펴보니 한 10명 중 1-2명만의 비즈니스만이 지금까지 실제로 운영되고 있거나 성장중인 것 같다. 어느 순간 단체 채팅방에서 조용히 자취를 감춘 사람들도 있고, 생각나서 사이트를 들어가보면 없어졌거나 관리가 안되고 있다. 대부분의 소속, 직함도 2-3년 사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나의 첫번째 완벽한 실수
맨 처음 아이디어를 비즈니스로 실현하겠다 마음먹었을때,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회사를 만들고 바로 명함도 만들고 founder, CEO라는 말을 이름앞에 붙였다. 내 이름 앞에 붙인 이 말들이 마법을 발휘할거라 내심 기대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 것을 내가 가장 잘못했던 일의 맨 앞에 둔다.
만약 진행중인 비즈니스가 아래 세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직함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필요가 없다.
1.만원이든 백만원이든 실제로 수익을 못내고 있다. 한마디로 비즈니스가 아직 돌아가지 않는다.
2. 한명이 하나 이상의 영역을 커버해야한다. 다같이 여러 부문을 함께 고민해야한다.
3. 하나의 직무에 단 한명만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CTO, CMO, CEO 같은 직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직함 자체에 매몰될 수 있기때문에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이름 자체가 주는 힘은 크기 때문에 이름만으로 책임감이 부여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나, 그에 걸맞는 시선과 대우에 대한 희망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능력치가 안되는데 책임감만 부여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가 사업 자체의 성공에 중요했던가?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는데 집중하기
비즈니스 기획자, 프로덕트 담당, 개발자, 그로쓰매니저 등이 모두 온전히 갖춰진채로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주축이 되는 개발자가 초기부터 있다고해도 CTO급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C자로 시작하는 명칭들을 이름앞에 붙여두는데 익숙하다. 초기 스타트업에 C자로 시작하는 직함들로 멤버가 채워져있다해도 비즈니스 성장이나 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생존과 성장이 중요한 스타트업이나 초기 팀에서 이런식의 호칭으로 업무를 의식적으로 구분한다면 정작 중요한 업무 영역을 선긋기하느라, 진행이 애매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된다. 초기에 이런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낭비다. 투자사,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직함이 필요할 수 있지만 간단한 요식에 가까울 수 있다. 직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집중해야하는 것은 성장을 위해 함께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CTO를 찾습니다', 'CMO를 찾습니다'라는 스타트업 커뮤니티의 이런 말들은 와닿지 않고, 투자자들이 초기 스타트업에게 'CTO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와닿지 않는다. (물론, 업종이나 사업계획, 로드맵의 특성상 필요한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요즘같이 사업을 성장시키는데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고 AI나 노코드솔루션 등의 발전으로 한계나 제약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면 이 질문의 중요도나 의미가 모호해진다.) 차라리 CTO보다는 '함께 개발할 사람', CMO보다는 '함께 성장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할 사람'이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직함 놀이보다 현실에 직면하기
직함이 없으면 일에 집중할 수 없다거나 평생의 소원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의 나라면, 이런 사람을 팀에 합류시키는 것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초기부터 C자 돌림의 직함을 서로 나눠갖고 명함에 새기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프로덕트나 세일즈보다 뒷전에 있어야 마땅하다.
C자가 없으면 세일즈나 영업, 투자에 지장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때 나도 그런 이야기에 동의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초기팀은 매끈함보다 투박함이, 능숙함보다는 열의가 넘쳐야한다. C자 직함을 붙인다고 능력과 신념까지 바로 품긴 어렵다. 기본적인 역할만 설정하되, 실제 일을 진행하고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면서 직함을 붙여도 문제가 없겠다싶다. 그러니, 그런 직함을 내 이름앞에 붙이는 것, 누군가의 이름앞에 붙이는 것, 그 직함으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에 연연하지말자. 일단 살고 볼 일이다.
몇년전으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